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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DVD]나폴레옹 (3disc)(The Campaigns Of Napoleon:The Story Of The Napoleonic Wars(3d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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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고시

  • 제작사 또는 공급자 : Dawoori Entertainment
  • 이용조건, 이용기간 : All 이상 이용가,미디어 재생가능한 플레이어 보유시/제품 훼손전까지
  • 상품 제공 방식 : 출시사에서 제작한 방식의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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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 상담 관련 전화번호 : 티미디어 (02-706-8383)

PRODUCT DESCRIPTION

Special Feature

Interactive Menu, Scene Selection, Subtitle

Additional information

* 아우스터리츠 전투 : 1805 The Battle of Austeritz!!
* 모스크바 원정 : 1812 Napoleon’s Road to Moscow!!
* 워터루 전쟁 : 1815 The Battle of Waterloo!!

[PRODUCTION NOTE]
이 세상에서 가장 군인다운 지휘관이며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한니발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되는 나폴레옹에 관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총 3편으로 이루어진 DVD 박스 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대한 자료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특색있게 재편성하여 특징적인 부분을 재구성하였다. 각종 3D 그래픽과 Mapping 화면, 각종 연대기 이미지를 통해 쉽고 명쾌한 영상을 제공하고 있으며 나레이션이 가미되어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나폴레옹의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영상을 보고 있으면 마치 과거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나폴레옹의 역사 중에 가장 장대한 전투를 골라 DVD 영상으로 구성하였다.

1805 The Battle of Austerlitz 아우스터리츠 전투 : 나폴레옹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의 하나.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전쟁으로 남게 되었다.

1812 Napoleon’s Road to Moscow 모스크바 원정 : 엄청난 폭설이 내리는 러시아 원정때의 이야기로써 나폴레옹의 가장 큰 모험이었다. 약 65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 가장 큰 전투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1815 The Battle of Waterloo 워털루 전쟁 : 나폴레옹이 최후의 패배를 겪은 전투. 이 전쟁으로 계속된 그의 무모한 야망과 꿈이 무너졌으며 잔인한 전쟁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로 유럽은 비로소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줄거리
1805 The Battle of Austerlitz : A Superb Record of the Emperor Napoleon’s Greatest Triumph
아우스터리츠 전투 : 제 3차 유럽 동맹전쟁의 첫번째 전투
나폴레옹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둔 전투의 하나로써 6만 8천명의 나폴레옹군이 명목상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하에 있는 9만여 명의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의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평화협정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프로이센은 대 프랑스 동맹에 가담하기를 한동안 망설였다. 전투는 프랑스가 11월 13일 빈을 공략하고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동맹군을 모라비아 (지금의 체코 슬라프코프우브르노)로 몰아넣은 뒤, 모라비아의 아우스터리츠 근처에서 벌어졌다. 전쟁터로 달려온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쿠투조프가 갖고 있던 최고 지휘관을 사실상 박탈했다. 동맹군은 아우스터리츠 서쪽에서 나폴레옹과 싸우기로 결정하고 나폴레옹이 함정으로 비워놓은 프라첸 고원을 점령했다. 이어서 동맹군은 프랑스 군을 빈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약 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프랑스 군의 남쪽을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1만 5천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루이 다부원수의 프랑스 군단이 이 공격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나폴레옹 군의 북쪽 측면을 공격한 동맹군의 보조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는 동안, 나폴레옹은 니콜라 술트 원수에게 2만 명의 보병을 주어 프라첸 고원 위에 고립되어 있는 동맹군의 허약한 중심부를 격파하게 했다. 나폴레옹이 예비병력 중에서 보내준 2만 5천 명의 증원군과 함께 고원을 되찾으려는 동맹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1812 Napoleon’s Road to Moscow : A Disaster in the Snow - The Story of Napoleon’s Russian Campaign
모스크바 원정 : 1812년에 시작된 나폴레옹 1세의 러시아 원정
나폴레옹은 1806년 2월 베를린 칙령으로 대륙봉쇄를 선언하고 다음해 틸지트 조약에 의해러시아에게도 협력할 것을 요구했지만 곡물 수출국인 러시아가 불응하자 1812년 64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병력의 반은 폴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의 동맹국 군대였다. 러시아는 스웨덴, 영국, 에스파냐 등과 동맹을 맺고 바르클라이 데 톨리 장군 휘하의 제 1서부군, 바그라치온 장군의 제 2군 그리고 토프만프 장군의 제 3군 등 약 23만을 이끌고 방위에 나섰다. 그 해 6월 24일 네만강을 건너 나폴레옹군은 빌나, 스몰렌스크를 거쳐 계속 진격해 총사령관 쿠트조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군과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교전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9월 14일 러시아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평화교섭제의는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무시되고 또 모스크바가 원인 불명의 대화재로 초토화되어 식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겨울도 다가와 나폴레옹은 10월 19일 모스크바 철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각은 러시아 군의 추격과 농민의 게릴라 공격으로 비참했으며 마네강을 건너 도망쳐 온 군사는 겨우 2만 5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 10만을 포함하여 55만 명을 이 원정으로 잃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원정은 2년 후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1815 The Battle of Waterloo : A Powerful Account of the Final Defeat of the Emperor Napoleon 워털루 活?
나폴레옹이 복귀한 100일 천하 때 워털루 (브뤼셀에서 15km 남쪽에 있음) 남쪽 5km 지점에서 나폴레옹의 7만 2천 병력과 웰링턴 공작의 동맹군 6만 8천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군대) 및 게르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주력 부대인 약 4만 5천명의 프로이센 군 사이에 벌어졌다. 나폴레옹 군 원수인 미셸 네와 에마뉘엘 드 그루시는 리니에서 프로이센 군을 물리치고 6월 16일 워털루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웰링턴을 카트르브라에 묶어둔 후 적이 분산되어 있을 때 공격해 섬멸하는데 실패했다. 나폴레옹의 총 병력 10만 5천명 중 약 1/3에 해당하는 3만 3천명을 거느린 그루시는 뒤늦게 블뤼허를 추격했다. 6월 18일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블뤼허 후위군 1만 7천명의 저지를 받았으며 그 동안 블뤼허의 주력부대는 위기를 벗어나 웰링턴 군대와 다시 합류해 13km 남서쪽에 있는 워털루에서 전투의 대세를 바꾸어 놓았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아침에 웰링턴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던 것을 땅이 마르는 정오로 연기하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는데 바로 이 때문에 블뤼허 군대는 워털루에 도착해 웰링턴 군대를 지원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동맹군의 총 진군이 시작되고 동쪽에서는 프로이센 군이 공격을 개시한지 15분 만인 오후 8시에 근위대가 퇴각했다. 나폴레옹 군대 중 2만 5천명이 사상 당하고 9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웰링턴 군대는 1만 5천명, 블뤼허 병력은 약 8천 명이 사상당했다. 4일 후 나폴레옹은 2번째로 퇴위했다.

[About The NAPOLEON]
나폴레옹의 명언들

나의 실패와 몰락에 대하여 책망할 사람은 나 자신 밖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나 자신의 최대의 적이며, 비참한 운명의 원인이었다.

내가 꿈을 이루면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된다. 꿈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다.
모든 죄의 기본은 조바심과 게으름이다.
승리는 가장 많이 인내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다.
1%의 가능성, 그것이 나의 길이다.

우리가 어느 날 마주칠 재난은
우리가 소홀히 보낸 어느 시간에 대한 보복이다.

의지할 만한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힘이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는 이미 패배한 자이다.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천재의 능력일지라도 기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않는 것이며
성공했다고 지나친 기쁨에 도취되지 않는 것이다.

비장의 무기가 아직 나의 손에 있다. 그것은 희망이다.

[BIOGRAPHY]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 태어난 그의 이름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 이후의 사회적인 안정 분위기에 편승하여, 제 1제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치적인 면에서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한 그는 세계 역사상 알렉산더 대왕과 줄리어스 시저와 비견되고 있다.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10세 때 브리엔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임관 뒤 포병소위로 지방연대에 부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파올리 아래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 반란을 진압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최초로 공적을 세웠다. 로베스 피에르의 동생과 친분을 갖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군의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 파로 몰려 체포되고 직위를 잃는다. 1795년 10월 5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반란군을 축출했다. 이를 재기의 기회로 삼아,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세핀과 결혼하여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받는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1799년 11월 9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 1통령으로 임명받아 군사독재를 시작하였다. 제 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1800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 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 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베토벤은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며 ‘그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패전하고 만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꺾고, 프랑스 육군은 전 유럽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면서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동맹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어 실각된다.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여 ‘백일천하’를 이루고, 6월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후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