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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DVD]안개 낀 부두 (1disc)(Port Of Sha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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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SCRIPTION

Special Feature

Additional information

2차 대전 전까지 프랑스 영화사에서 시적 리얼리즘이 중요한 경향으로 두드러지는 데 촉매 같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영화가 <안개 낀 부두>이다. 영화는 다른 세상을 향한 통로가 될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세상의 끝일 수밖에 없는 항구 도시를 배경으로 탈영병 장과 후견인에게 고통 받는 어린 넬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내 실패로 끝날 사랑 이야기를 어두우면서 서정적인 톤으로 들려준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는 “전체 영화를 감싸는 절망의 안개”에 감탄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즉 그 주제가 비도덕적이고 분위기는 패배주의적이라는 점 때문에 다른 많은 이들은 이 영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대한 감독 “마르셀 까르네”

대표작 <안개 낀 부두> <새벽>
마르셀 까르네는 30, 40년대에 <안개 낀 부두 Quai des Brumes>(1938) <새벽 Le Jour se lève>(1939) <북호텔 Hotel Du Nord>(1938) 등의 영화를 만들어 ‘시적 리얼리즘’의 한 경지를 열었던 프랑스 감독. 흔히 프랑스영화하면 떠오르는 우수에 차고 퇴폐적인 예술적 이미지는 바로 까르네가 세워놓은 ‘시적 리얼리즘’의 전통 때문이다.
1909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까르네는 28년 자크 페데 감독의 <새로운 신사>에 촬영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 뒤 페데 감독과 르네 클레르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알베르 크랑쉬란 가명으로 영화평도 썼다. 그런 다음 페데의 도움으로 <제니 Jenny>(1936)라는 제목의 약간 상투적인 멜로드라마로 첫 연출작품을 세상에 냈다. <제니>는 그저 그런 반응을 얻었지만 까르네는 이 작품을 하면서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자크 프레베르와 인연을 맺는 행운을 얻었다. <고엽>이란 샹송의 작사가로도 유명한 프레베르는 유머와 적당한 감상주의와 사회적 풍자를 섞은 대본을 쓰는 데 천재였다. 까르네는 프레베르와 짝을 이뤄 불멸의 ‘시적 리얼리즘’ 걸작을 찍어냈다. 프랑스 영화사가 장 미트리는 “까르네와 프레베르가 함께 만든 <안개 낀 부두> <이상한 드라마 Dr e de Drame> (1937) <새벽>는 까르네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영화의 보기 드문 걸작이다”라고 평가했다. 까르네와 프레베르가 활동한 시기는 프랑스 스튜디오 시스템의 전성기였으며 장 가뱅, 미셸 모르강 등 잘 훈련된 배우들과 무대 디자이너 알렉산더 트로네, 음악가 모리스 조베르 등이 카르네 영화의 미적 수준을 높여 주었다.
까르네와 프레베르 콤비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후부터는 현대보다는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주로 찍었다. <밤의 방문객 Les Visiteurs du Soir>(1942) <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1945)이 이 시기의 영화들이다. 특히 <인생유전>은 19세기의 파리에서 연극과 사랑에 청춘을 바친 젊은이들의 얘기를 담은 3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영화사에서 길이 칭송받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까르네/프레베르의 협동작업에 균열이 왔다. 까르네가 주제를 정하고 대강의 화면 그림을 정하면 거기에 맞게 프레베르가 대사를 쓰던 것이 <밤의 방문객> 이후에는 프레베르가 주제를 정하고 얘기를 구성하면 까르네가 거기에다 필요한 기술적 주석을 다는 것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두 사람은 47년 <꽃다운 나이 La Fleur de l'âge>(1946)를 끝으로 결별했다.

전후에 까르네가 만든 영화는 30년대의 작품맨?시각적 우수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프레베르 없는 까르네의 영화는 무미건조했다. 게다가 까르네는 ‘프레베르가 대사를 쓴 까르네의 영화가 아니라 까르네가 감독한 프레베르의 영화’라는 이유 때문에 훗날 50년대의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에게 호된 비난을 들었다. 50년대 이후의 까르네의 명성도 볼품없는 것이 됐다. 한때 프랑스영화가 자랑했던 할리우드 못지않은 스튜디오 촬영의 우수한 수준도 까르네의 퇴조와 함께 몰락했다. 74년과 84년에도 까르네는 신작을 발표했고 92년에는 기 드 모파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 기획에 착수했다. 92년 칸영화제에 나타난 까르네는 “난 아직도 힘이 남아 있다.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말년의 그의 영화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프랑스 고전영화의 전통을 대표했던 까르네는 50년대의 누벨바그 영화 바람에 밀려난 불우한 영화인이었고 한때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까르네의 대표작들은 훗날 영화역사에서 온전한 자리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