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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DVD]존레논 비긴즈 : 노웨어보이(Nowhere 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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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 상담 관련 전화번호 : 티미디어 (02-706-8383)

PRODUCT DESCRIPTION

Special Feature

- 존레논과 비틀즈의 탄생비화
- 삭제장면
- 메이킹 필름
- 뮤직비디오
- 극장용 예고편

Additional information

- 탄생 70주년과 타계 30주기를 맞은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 존 레논, 2010년 전세계가 그를 추모한다!
- 음악은 반항심 가득한 소년 존 레논을 꿈꾸게 했고, 그가 결성한 비틀즈는 록의 역사를 바꾸었다!
- 현대 미술계의 신데렐라 샘 테일러 우드 감독과 <디아워즈> <어톤먼트>의 촬영감독이 만든 마음의 풍경


음악과 처음 만난 그 특별한 순간!
전설의 팝아티스트 존 레논의 역사가 시작된다!

리버풀의 가난한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존은 부모의 불화로 이모 미미의 손에서 자라난다. 아빠처럼 든든하게 지켜주던 이모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상실감에 빠진 존은 이모 미미 몰래 엄마 줄리아를 찾아간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자신을 이해해주는 줄리아를 따르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는 존. 그러나 미미는 동생 줄리아의 무책임한 행동에 존이 다시 상처받을까 걱정하고 둘의 만남을 반대한다.

한편, 전세계적인 열풍이 불고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접한 존은 그의 노래와 패션은 물론, 로큰롤 세계에 흠뻑 빠져든다. 이모와 엄마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혼란과 불안감에 힘겨워 하던 존은 음악에 더욱 깊이 빠져 들고,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기로 한다. 밴드 멤버를 구하던 중 기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폴 매카트니를 만나 음악을 향한 열정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마침내 존은 전설적 팝그룹 비틀즈의 전신인 쿼리멘 밴드를 결성하고 리버풀의 작은 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하는데...

■ Who is Beatles?

존 레논(John Winston Lennon 1940.10.9~1980.12.8)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6.18~ )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25~2001.11.29)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7.7~)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도 더 인기가 있다(We’re more popular than Jesus now)” 1966년에 비틀즈의 리더 존 레논이 인터뷰에서 했던 이 유명한 발언은 몇 달 뒤 미국으로 전해지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독교는 사라질 것이고 로큰롤이 먼저 사라질지 기독교가 먼저일지 알 수 없다는 이 말에 극우단체인 KKK단을 위시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격분하여 비틀즈 앨범 화형식에 공연 반대 시위까지 했다. “기독교를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존 레논의 사과는 바티칸 교황청에 의해 42년 만에 받아들여졌다. 2008년 교황청은 기관지인 ‘세르바토레 로마노’를 통해 그때의 소동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 세대로 자라며 급작스런 성공에 취한 영국 노동계급 청년의 ‘과시’로 이해된다면서 “비틀즈는 시간을 거슬러 살아남아 한 세대 이상 대중음악가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교황청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전세계 대중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밴드 비틀즈. 돌아보면 록의 역사를 바꿨던 음악은 당시의 유행 음악에 뒤쳐지는 변방의 음악들이었다. 미국 남부 시골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트럭 운전사를 하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촌티 나는 흑인 음악을 앞세우고 등장했다. 비틀즈 역시 음악 산업과는 거리가 먼 항구도시,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뒷골목 술집에서 흑인들의 리듬 앤 블루스 비트를 커버하며 자신들의 음악을 가꿔갔다. 쿼리뱅크 고등학교 출신인 존 레논이 학교 이름을 딴 ‘쿼리멘’이라는 스쿨밴드를 결성한 1956년경은 미국식 포크-블루스의 영국판 스키플(skiffle)의 전성시대였다. 음악적 지식이나 재능 없이도 빨래판이라도 들고 무대에 올라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음악이 음악인만의 것이 아니었던 행복한 시대. 리버풀에는 자생적인 스키풀 그룹들이 줄을 이어 나오는 밤샘 댄스 파티가 수백 개씩 열렸다.

존과 폴이 처음 만난 1957년 7월 6일은 비틀즈의 기원이 된 의미 있는 날이다. 성 베드로 축일, 울튼 교회에서 아마추어 공연을 끝낸 존에게 친구 아이반이 같은 학교 리버풀 인스티튜트에 다니는 폴을 소개했다. 막 15살이 된 폴은 존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벤조 코드밖에 몰랐던 존에 비해 기타 실력은 앞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얼마 후 언제나 붙어 다니며 서로를 배워갔다. 훗날 첫 싱글로 발표되는 ‘러브 미 두(Love Me Do)’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공동 창작곡이다. 존이 미술대학으로 진학하고 폴이 학교 후배 조지 해리슨을 데려 오면서 ‘쿼리멘’이라는 이름은 연고가 없어졌다. ‘레인보우즈’ ‘문독스’ ‘실버 비틀즈’ 등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이름을 바꾸던 밴드는 1960년 8월 그룹명을 비틀즈로 확정지었다. 버디 홀리(1959년 2월 ‘라밤바’의 리치 밸런스와 함께 순회 공연 도중 비행기 사고로 요절한 록의 대부가 이끄는 ‘크리케츠’의 팬이었던 존은 귀뚜라미와 영국 전통 운동경기를 뜻하는 그런 이름을 좋아했다. “딱정벌레(beetles)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그 철자를 BEAT-les로 바꾸어 써보았다. 비트(beat)음악을 연상시키는 말장난이었다.”) 그 해 8월 독일 함부르크로 옮겨가 인드라 클럽과 카이제켈러에서 하루 8시간씩 꼬박 연주하며 기량을 연마해 갔다. 존, 폴, 조지 외에 뒤늦게 들어온 드러머 피트 베스트, 베이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당시 멤버였다. (존의 미술대학 절친 스튜어트의 이름은 이 영화 끝에도 나오는데, 그림에 재능이 많았던 그는 함부르크 미술대학을 다니다가 1962년에 요절했다.)

1961년 이후에 '제5의 비틀즈 멤버'라고 불리는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매니저 계약 체결 후 비틀즈는 대규모 음반 회사들의 무수한 오디션 낙방 끝에 드디어 EMI 자회사인 팔로폰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눈에 들면서 62년 6월 첫 오디션을 보았고, 드러머를 링고 스타로 교체한 후 그 해 10월 첫 싱글을 발표하였다. 두 번째 싱글 『플리즈 플리즈 미(Please Please Me)』가 히트하며 동명의 첫 앨범이 나왔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963년 11월에는 두 번째 앨범 『윗 더 비틀즈(With The Beatles)』에 이어 다섯 번째 싱글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가 발매 동시에 1위를 기록했다. 이 싱글은 비틀즈의 미국 진출에 발맞춰 이듬해 1월 대망의 첫 미국 싱글로 발매되어 3주만에 차트 정상으로 뛰어올라 7주간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64년 2월 미국에 도착한 비틀즈가 출연한 CBS 텔레비전의 '에드 설리번 쇼'는 당시 최고 기록인 7300만 명이 지켜봤고, 이 시간 미국 전역에서 10대 청소년 범죄율이 제로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두 달 후 4월 4일자 빌보드 차트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비틀즈의 노래가 석권했으며, 그 해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도 비틀즈가 독식했다. 케네디 암살 후 무겁고 암울한 공기에 젖어있던 미국 청소년들에게 떠들썩하고 시원스러우면서도 밝고 힘찬 영국 그룹의 노래는 청량제와도 같았으며, 영국 그룹들의 미국 입성은 록이 코스모폴리탄 음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 4월에 해체를 선언했던 비틀즈의 파워는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공식적으로 활동했던 1962년부터 69년까지 7년 남짓한 이 기간에 비틀즈는 마지막 정규 앨범 『렛 잇 비(Let It Be)』와 영화 OST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Magical Mystery Tour)』까지 총 13장의 앨범과 215여 곡 정도를 발표했다.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1위로 올린 노래는 무려 20곡으로 아직까지도 이 기록을 깬 가수는 없다. 블루스를 저변에 깔고 로큰롤과 발라드부터 포크, 아트록, 사이키델릭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신선한 시도로 앞서갔던 그들의 앨범은 세대와 문화를 초월한 고전으로 추앙 받았다. 비틀즈는 동료와 후배들에 의해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그룹이며, 트레이드 마크였던 패션 스타일과 음반 아트웍 또한 불멸의 인기를 구가하며 수없이 모방되었다. 따라서 음악 팬들에게 비틀즈 앨범 중 최고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아마 영화 팬들에게 왕가위 영화 중 어떤 작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만큼이나 난감한 것이 될 것이다. 참고로 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은 비틀즈의 명곡 중 베스트 Top10을 뽑았는데, 존과 폴이 함께 만든 ‘어 데이 인 더 라이프(A Day in the Life)’가 1위로 꼽혔다. 2위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I Want to Hold Your Hand)’, 3위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Forever)’. 4위 ‘예스터데이(Yesterday)’, 5위 ‘인 마이 라이프(In My Life)’, 6위 ‘섬씽(Something)’, 7위 ‘헤이 주드(Hey Jude)’, 8위는 ‘렛 잇 비(Let It Be)’, 9위 ‘컴 투게더(Come Together)’, 10위 ‘와일 마이 기타 젠틀리 윕스(While My Guitar Gently Weeps)’가 그 뒤를 이었다.

■ About Movie

미술에서 영화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본능!
현대 미술계의 신데렐라 샘 테일러 우드 감독과 <디아워즈> <어톤먼트>의 촬영감독이 만든 마음의 풍경

샘 테일러 우드는 사진과 영상을 이용한 설치 미술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현대 미술계의 기린아다. 영국 젊은 아티스트(YBA: Young British Artist) 그룹의 대표작가로 손꼽히는 그녀는 1997년 런던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시를 통해 주목 받기 시작하여 1998년 터너 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주연으로 한 엘튼 존 뮤직 비디오를 감독했으며, 데이비드 베컴이 훈련을 마치고 낮잠 자는 모습을 원 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하여 만든 <데이비드>(2004)는 영국 초상화 미술관에 전시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냉소적이면서 강렬한 영상 속에 상류층의 권태와 명성에 대한 집착, 현대인들의 일상에 깃든 고립감을 치밀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녀의 장기였다.

첫 단편영화 <러브 유 모어(Love You More)>(2008)가 칸 국제영화제 최우수 단편영화 후보에 오르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특별 언급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장편 데뷔작인 <존레논 비긴즈-노웨어보이>에서는 특유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존 레논의 유년시절을 섬세하게 옮겨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부모에게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존 레논의 오랜 트라우마를 드러내기 위해 꿈이라는 장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등 인물들의 내면에 능숙하게 다가가는 솜씨는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냈으며 디테일 하나 하나에 사실성을 불어넣은 꼼꼼한 화면은 비틀즈 팬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철학을 논하고 시를 쓰는 샘 테일러 우드 감독은 2010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문에 이 영화를 노미네이트 시키며 다음 영화가 가장 기다려지는 무서운 신예로 단번에 부상했다.

영화 속에서 존 레논은 시내 전차의 범퍼에 올라타 페니 레인(Penny Lane)을 달리고, 지역 구세군에서 운영하는, 여름마다 존이 좋아하는 대규모 가든 파티가 열렸던 어린이 집 스트로베리 필즈를 지나간다. 이 모든 장면들은 감독의 단편에 이어 장편까지 연이어 작업하게 된 시머스 맥가비(Seamus McGarvey)에 의해 촬영되었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와 <솔로이스트>(2009)를 찍었을 만큼 음악영화와 인연이 각별하고, <디아워즈>(2002), <어톤먼트>(2007) 등을 통해 그림처럼 아름다운 화폭으로 각광 받았던 그는 이 영화에서도 자신의 시대를 기다리는 소년의 미숙함과 열정을 풍부한 감수성으로 따스하게 그려내었다.

■ Production Note

“존 레논은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여야 한다!”
6개월간 하드 트레이닝을 받은 아론 존슨의 눈물 투혼!

영화 <존레논 비긴즈-노웨어보이>의 주연은 원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음악적 재능을 잘 표현 할 수 있는 뮤지션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영화의 제작 소식을 접한 아론 존슨이 존 레논 역할에 욕심을 내면서 분위기는 뒤바뀌었다. “기타를 직접 연주하지 않으면, 직접 연기하는 부분은 6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의 연기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나이답지 않은 프로 의식으로 제작진의 깊은 신뢰를 끌어낸 아론 존슨은 결국 최종 낙점을 받았다. 진짜 존 레논처럼 보이기 위해 6개월간 노래와 기타를 연습해야 했던 그의 열정은 연기를 넘어 녹음과 OST 제작에서도 빛을 발했다. 영화를 위해 결성된 프로젝트 밴드 ‘더 노웨어 보이즈’에서 그는 보컬과 기타를 맡아 실제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동안 갈고 닦은 연주 실력을 선보였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아론 존슨이 쿼리멘 시절의 ‘인 스파잇 오브 올 더 데인져(In Spite Of All The Danger)’를 직접 부르는 장면은 비틀즈 팬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23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촬영 중 연인으로 발전한
샘 테일러 우드 감독과 아론 존슨의 영화 같은 러브스토리!

10대의 존 레논이 음악과 동료를 만나면서 방황을 접고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그린 <존레논 비긴즈-노웨어보이>는 실존 인물들의 일화뿐만 아니라 특별한 가십으로도 주목 받았다. 바로 주연 배우 아론 존슨과 샘 테일러 우드 감독이 23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약혼을 발표한 일대사건 때문이었다. 촬영장에서 감독과 배우로서 서로의 열정에 반한 것을 시작으로,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은 스캔들로 끝날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예상과 달리 연이은 공식석상에서 다정한 모습을 보이더니 지난 7월에는 그들의 2세까지 출산하여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나이차 많은 또 다른 커플인 영화 <원스> 주인공들이 한때 연애를 했듯이 음악에는 쿼리멘 밴드의 노래 제목처럼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를 하나 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미술에서 영화로 지평을 넓히며 재능을 보여준 샘 테일러 우드 감독과 일과 사랑에 열정이 넘치는 배우 아론 존슨,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둘의 열애로 더욱 아름다운 영화 <존레논 비긴즈-노웨어보이>에서 그들의 환상적 호흡을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