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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DVD]살바토레 줄리아노 (1disc) (Salvatore Giul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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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DESCRIPTION

Special Feature

Additional information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시실리의 의적, 영웅 살바토레 줄리아노 Salvatore Giuliano ( 1922 - 1950 ) 의 일생은 소설로, 영화로, 또 오페라로도 재구성 되었다.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프란체스코 로시 Francesco Rosi 가 영화 “살바토레 줄리아노” 를 1961년에 제작하였고, 영화 “대부”의 원작 소설가로 유명한 마리오 푸조 Mario Puzo 가 그의 일생을 차용하여 소설 “시실리안 The Sicilian”을 1984년에 발표.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시실리안”이 크리스토퍼 램버트 Christopher Lambert 주연으로 1987년에 만들어졌다.
1985년에는 이탈리아 작곡가 로렌조 페레로 Lorenzo Ferrero 가 오페라“살바토레 줄리아노”를 작곡하여 초연한다. 소설이 아닌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살바토레 줄리아노를 다룬 책은 개빈 맥스웰 Gavin Maxwell 의 “God Protect Me from My Friends”(1956), 빌리 챈들러 Billy J. Chandler 의 “King of the Mountain”(1988), 줄리아노의 여동생이 출간한 줄리아노의 전기“My Brother, Salvatore Giuliano”(2000) 가 있다.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그 짧은 생애가 우리나라의 격동기와 겹쳐, 거의 우리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와 유럽 대륙은 물론 미국을 포함, 전 서방 세계의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시실리 인들에게는 영웅이고 희망의 대명사였다. 줄리아노의 사진은 “라이프”잡지에 실렸으며,“타임”지에 그의 기사가 실린 것만도 여섯 차례나 된다. 7년에 불과한 그의 짧은 활동 기간 동안 유럽의 신문들은 그에 대한 기사를 거의 매일 보도하였다.
줄리아노의 생애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혼란했던 이탈리아의 정치 사회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이탈리아 사회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다.
2. 해방 그리고 운명의 갈림길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1922년에 시실리 팔레르모 Palermo 인근 마을 몬텔레프레 Montelepre 에서 태어났다. 줄리아노가 성장할 때의 시실리의 사회 환경은 매우 열악하였다. 미국 대공황의 영향으로 1930년대 유럽은 경제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으며, 이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의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1939년부터 유럽 대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 속으로 돌입하게 된다.
1943년, 오랜 전쟁으로 유럽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했을 뿐 아니라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였다.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매일 힘든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시실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3년 7월 연합군의 상륙 작전으로 시실리 섬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추축국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연합군에 의해 수복된 시실리는 몹시 혼란한 상태였다. 1945년 해방 후 우리나라의 모습을 상상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혼란 속에서 밀가루, 설탕, 연료, 담배, 올리브 오일, 의약품 등 많은 생활필수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군정은 생필품을 고루 나누기 위하여 배급제를 실시하고 사적인 거래를 규제했으나 별 소용없이 식량과 생필품의 암거래는 매우 성행하였다. 암거래는 물론 불법으로 단속의 대상이었다.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암시장으로부터 두 포대의 곡식을 구입하여 집으로 운반하던 중 산길에서 이탈리아 무장경찰, 카라비니에리 carabinieri 의 검문에 걸리게 된다. 1943년 9월 2일의 일이다. 줄리아노는 만 20세였다. 이때 암시장에서의 경제활동은 아주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를 감안하여 한번만 눈을 감아줄 것을 빌던 줄리아노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틈을 타서 도망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 시비가 일어나 한 사람의 카라비니에리에게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자신도 총상을 입게 된다. 총에 맞은 카라비니에리가 다음날 사망하였기 때문에 줄리아노는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되었다. 당국에 자수할 생각이 없었던 줄리아노는 이때부터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1943년 12월, 줄리아노를 체포하기 위하여 줄리아노의 집을 찾은 카라비니에리는 줄리아노 대신 일단의 몬텔레프레 마을 사람들과 줄리아노의 아버지를 체포하여 경찰 형무소에 가두었다. 민주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이때는 아직까지 새 법이 제정되지 않아 파시스트 정권의 법률이 그대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줄리아노는 자기와 비슷한 처지로 도망 다니는 일단의 무법자들을 규합하여 경찰 형무소를 습격, 수 명의 카라비니에리를 사살하고 죄수들을 해방시켰다. 옛부터 경찰 등 중앙 정부를 혐오하던 시실리 사람들은 이에 줄리아노를 영웅시 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강도질을 통해 획득한 재물과 식량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줄리아노의 선행에 감격하여 줄리아노의 편을 들게 된다.
살바토레 줄리아노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 가스파레 피치오타 Gaspare Pisciotta ( 1924 - 1954 ) 와 함께 50 명에서 많을 때에는 200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었다. 줄리아노는 열차 강도를 감행했고, 귀족의 집을 털었으며, 귀족을 납치하여 몸값을 받아내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매우 신사적인 매너를 고수한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진다. 또한 줄리아노는 범죄로 노획한 재물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당시 매우 가난했던 시실리 민중들에게 대부분 나누어 주어 높은 인기를 얻었다. 로빈 후드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낭만적 의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도시 빈민이나 시골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카라비니에리(경찰)의 동향을 줄리아노 일당에게 알려주는 등 심정적으로 줄리아노의 편을 들었다.
그리하여 줄리아노는 시실리 서부지역에서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탈리아 당국의 체포 작전을 효과적으로 피해 다녔고, 오히려 때로는 반대로 카라비니에리 부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줄리아노와 그 일당은 깊은 산중에 거점을 두고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기 때문에 당국의 체포 작전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살바토레 줄리아노가 시실리 인의 희망으로 떠오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이민족과 이탈리아 주류 사회에 의해 피지배 민족 취급을 받던 시실리 인들은 독립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줄리아노는 정치적으로 시실리의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줄리아노는 시실리의 독립을 원하는 자신의 입장을, 또 자신이 저지르는 무법 행위에 대한 설명을 그때 그때 편지에 적어 신문사에 보냈으며, 신문은 그를 받아 보도하여 줄리아노의 유명세를 더해주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줄리아노는 사람들에게 King of the Mountain 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