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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장을 떠돌아다니는 젊은 노동자 영달(백일섭)은 밥집 여주인과 바람을 피우다 들켜 도망 나온다. 영달은 눈밭에서 옷을 입다 중년의 정 씨(김진규)를 만난다. 정 씨는 교도소를 나와 10년 만에 고향 삼포로 향하는 길이다. 눈길을 헤치고 걸어가던 두 사람은 시장기를 때우러 식당에 들르고, 여주인으로부터 도망친 작부 백화(문숙)를 붙잡아주면 돈 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간 끝에 그들은 다리 밑에서 백화와 마주친다. 백화가 호락호락하지 않아 영달과 줄곧 티격태격하지만, 세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나기로 한다.
정처 없이 눈길을 걷던 그들은 폐가에서 하루 묵기로 한다. 모닥불 앞에서 영달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예민해진 영달과 말다툼을 한 백화는 읍내로 내려가버린다. 백화를 찾으러 읍내로 내려간 정 씨와 영달은 선술집에서 싸우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다. 정씨는 아버지인 척 연기해 백화를 구해낸다. 그날 밤 영달과 백화는 같이 잠자리한다. 백화는 영달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영달은 장바닥에 그녀를 떼어놓고 역으로 가버린다. 백화가 역으로 찾아오자 영달은 돈을 털어 기차표를 사준다. 하지만 백화는 기차를 타지 않는다. 영달은 일꾼들을 만나 공사판으로 떠나고 정 씨는 큰 다리가 놓인 삼포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영화사의 대표작이자 이만희 감독의 유작인 <삼포가는 길>(1975)을 블루레이로 출시한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하고 블루키노가 제작한 24번째 블루레이 타이틀이다. 황석영의 원작을 영화화 한 <삼포가는 길>은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영화작가 이만희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만희는 이 영화를 편집하던 1975년 4월 3일에 쓰러져 4월 13일 작고했고, 영화는 이후 제작사에 의해 최종 편집되어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975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남우조연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했다.
하층민의 고단한 삶을 따뜻하게 감싸는 로드무비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흔치 않은 로드무비 장르에 속한다. 로드무비는 사전에 조밀하게 구성된 플롯이나 캐릭터에 기반하는 일반적인 장르영화 달리 등장인물들의 행로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사건과 만남,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등장인물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술집에서 일하는 백화(문숙), 10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막 출소한 정씨(김진규), 전국을 떠돌며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영달(백일섭) 세 하층민 남녀의 고단한 행로를 그리고 있는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우연히 강원도 산길에서 만나 일행이 된다. 한겨울 눈보라가 치는 강원도 산길을 헤치는 그들의 행로는 고단하기 짝이 없으나, 그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고 사랑을 나누며, 종국적으로는 헤어짐을 겪는다. 영화는 이들의 삶과 이야기에 주의깊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사연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하층민, 우리 주위의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이만희 영화의 여러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로드무비의 단순하고 느슨한 구조 속에서 이만희는 다양한 영화적 실험을 감행한다. 단순한 실험을 위한 실험이나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이 아니다. 이들은 관객들에게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선 영화적인 순간을 느끼게 하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알 수 없는 여운에 잠기게 한다. 이 영화가 당대의 평범한 대중영화를 넘어서는 이유다.
여전히 새로운 영화작가 이만희
이만희는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상대적으로 새롭게 발견된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만추>(1966), <삼포가는 길>(1975) 등의 대표작이 그에게 명성을 주었으나, 그의 영화세계 전모가 제대로 파악되거나 감독으로서의 진가가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 2006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전작전 등을 통해, 몇 편의 문제작을 제외하면 주로 군사영화, 반공영화, 멜로드라마, 스릴러 액션영화 등 장르영화의 감독으로 주로 알려져 있던(그리하여 다소 폄하되었던) 이만희의 진정한 영화세계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영화사를 상징하는 감독 중 한명으로, 우리 세대 씨네필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화들이 충분히 탐구되었다고 할 수 없다. 주목받지 못하는 영화가 아직도 많고, 기존에 알려진 영화라 하더라도 그 의미가 충분히 밝혀졌다고 할 수 없다. 이미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되는 <삼포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다. 여전히 그는 발견을 기다리는 감독이다.
아주 특별한 코멘터리와 부록영상, 소책자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코멘터리는 언제나 그렇듯 특별하다. 그는 러닝타임 내내 영화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삼포가는 길>이 왜 특별한지, 이만희라는 감독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꼼꼼하고 상세하게, 그리고 독창적으로 논변한다. 이와 함께 소책자에 수록된 뉴욕시립대학교 한남희 교수의 글은 영화학자로서 <삼포가는 길>의 영화적 실험성과 의미를 탐구하고 있다. 이 두 해설은 <삼포가는 길>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주인공 문숙 배우의 특별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영화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 이만희 감독의 연출 스타일,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 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만희 감독이 마지막까지 포함하지 않으려 했다는 증언은 매우 흥미롭다. 이 서플먼트들을 통해 관객들은 이 영화의 깊이와 의미를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