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1. 코멘터리 by michael Jeck
2.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예술세계(50분)
(making of seven samurai, 구로자와 아키라 인터뷰)
3. 7인의 사무라이 가이드
4. Trailers
5. Digitally Remastered
초도한정판에 한해 40페이지 분량의 가이드북과 오리지널 포스터를 증정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도호사 제작 영화 13편의 2005년 3월 극장 개봉에 맞춰 7인의 사무라이 한정판을 출시하며 화면과 사운드를 완벽하게 리마스터링 하여 선명한 화질과 dolby digital 5.1의 풍부한 사운드로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풍부한 서플먼트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예술 세계를 인터뷰를 통해 만나볼수 있다.
Additional information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로 국제적인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세계영화사의 거장반열에 올라섰다. 일본적 정서와 서구양식을 섞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가부키, 사무라이 등 일본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10년 3월 23일, 도쿄에서 8명의 형제,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로사와의 아버지 이사무는 학교교장이었고 어머니 시마는 오사카 상인집안 출신. 도쿄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닌 그는 사춘기 때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의 책을 탐독하고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미술대학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전시회에 자신의 그림을 출품하여 전시하게 된다.
구로사와는 26세 때인 1936년 도호영화사에 취직하여 연출부 말단부터 시작하여 야노 시게오, 야마모토 카지로 등 여러 명의 감독 밑에서 일하며 실전 영화경험을 쌓는다. 그는 도호영화사에서 차근차근 승진하여 1943년 33세의 나이에 영화 <스가타 산시로 Sugata Sanshiro>로 데뷔한다. 1944년 , 45년 <스가타 산시로2 Sugata Sanshiro Part2>를 만들었으며 의 주연배우였던 카토 카요와 결혼한다.
이후 몇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던 그가 결정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 걸작 <라쇼몽 Rashomon>부터. 한 사무라이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의 아내, 산적, 나무꾼, 죽은 사무라이의 영혼의 증언이 각각의 관점에 따라 사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함을 보여줌으로써 객관적인 진실은 없다고 말하는 이 영화로 구로사와는 51년 베니스 영화제 대상과 다음 해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다. <라쇼몽>은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 아쿠다가와 문학상을 탄생시킨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라벨의 음악 '볼레로'를 사용하여 일본 시대극을 서구식 화술로 풀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51년 뉴욕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라쇼몽>을 계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은 그는 1950년대 잇달아 걸작을 발표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1년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바탕으로 <백치 The Idiot>를 만들고 52년작 <이끼루 Ikiru>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다.
54년에 구로사와는 그의 또 다른 걸작 <7인의 사무라이 Seven Samurai>를 완성한다. 산적들의 습격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사무라이를 고용하여 산적과 맞선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서부영화와 유사한 화법에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원형태로 연출한 '원구도'로 유명하다. 이 영화 역시 서부극이라는 서구양식을 사무라이라는 일본적 소재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한데 구로사와의 이 영화는 후 존 스터지스의 <황야의 7인 The Magnificent Seven>(60)부터 <6현의 사무라이>, <사무라이 픽션>까지 수많은 영화와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한다.
이후 <산다는 것 Record of a Living Being>(55), 셰익스피어 "맥베스"의 일본판 <거미의 성 Throne of Blood>(57)과 <숨겨진 요새 The Hidden Fortress>(58)를 감독한 그는 1959년 구로사와 프로덕션을 설립한다. 구로사와의 1961년작 <요짐보 Yojinbo>는 마카로니 웨스턴의 효시가 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로 번안되었다.
그러나 구로사와는 65년 <붉은 수염 Red Beard> 이후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일본영화계가 높은 제작비에 비해 흥행성이 보장되지 않는 구로사와의 영화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처한 구로사와는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데 57년엔 20세기 폭스사와 <도라 도라 도라>를 계획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직에서 해임된 후 크게 자존심이 상한 구로사와는 최초의 칼라영화인 70년 <도데스카덴 Dodes' ka-den>마저 실패하자 71년 자살을 시도한다. 그의 자살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는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구로사와는 계속적으로 외국자본을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그는 소련이 제작비를 댄 <데루스 우잘라 Dersu Uzala>(75) 깐느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과 미국 합작의 <카게무샤 Kagemusha>(80),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 자본의 <란 Ran>(85), 미국자본의 <꿈 Dream>(90)을 만든다. 만년의 두 작품 <8월의 광시곡 Rhapsody in August>(91), <마다다요 No, Not yet>(93)만 일본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90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했는데 세르지오 레오네부터 <카게무샤>를 만들 당시 20세기 폭스사에 보증을 섰던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까지 수많은 감독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와 노극의 정적이며 명상적인 느낌에 세익스피어의 작품 등 서구문화를 줄거리로 역동적인 이동화면을 배합해 독특한 영화세계를 구축한 그는 세계 영화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거장으로 기억된다.
일본영화계에서 활동했지만, 세계를 호령했던 최고의 감독. 세계영화사에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한 이 거장은 서구와 일본의 문화적 접목을 통해 그의 뛰어난 영화들을 알렸다. 그의 장기는 정교하게 연출된 수공예적 고전 사극이나 액션 영화였고, 거의 서부극을 연상케하는 뛰어난 플롯을 자랑했다. 그가 주로 애착을 가진 인물은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와 극작가 셰익스피어였다. 칸느 영화제에 최초로 일본영화의 존재를 알렸던 <라쇼몽><7인의 사무라이> 등을 찍던 50년대와 <요짐보> 등을 찍던 60년대가 가장 화려했다. 그후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인상을 내비쳤고, 제작비가 많이 들고 흥행이 안되는 사극을 고집하는 바람에 영화 공백기를 가지기도 했다. 1980년 사극 <가게무샤>가 숱한 어려움 끝에 제작되어 우뚝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제작비 때문에 뉴욕에서 스토리보드 전시회를 하고, 제자임을 인정한 스티븐 스필버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조지 루카스 등이 도와준 결과였다. 이 영화는 칸느 영화제 대상을 받았고, 누군가의 대역을 맡은 '영무자'의 내면을 잘 그려내어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에도 <꿈><마다다요> 등 화려한 영화 활동을 했지만, 화려한 영화 형식과 언어에 비해 다소 공허한 느낌을 주었다. 그 점은 <가게무샤>에 짙게 깔려있는 허무주의에서 이미 예감한 바이기도 하다.
때는 전국시대, 끊이지 않는 전란(戰亂)이 만들어낸 "노부시"(野武士: 산적 무리)의 횡포에 백성들이 떨고있던 그때..
때는 일본이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16세기 말, 서양의 중세 기사처럼 명예로운 직업이었던 사무라이 계급이 총과 새로운 군사 전술학이 나타남으로써 쇠퇴해 가는 과도기적 시기이다. 해마다 산적들의 침략을 받아 양식을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번에도 추수가 끝나면 그들이 쳐들어 올 것이라 라는 걸 안 농부들은 사무라이들을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몇 명의 농부가 사무라이를 구하러 나서지만, 세 끼 음식과 잠자리와 싸우는 재미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보수가 없는 일이기에 쉽사리 구하지 못한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간베이(勘兵衛)를 비롯한 일곱 명의 주인 없는 사무라이를 구해서 마을로 돌아온다.이 사무라이들은 마을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등 산적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각자 개성이 강한 사무라이들과 마을 사람들은 상호 미묘한 관계로 잠시 갈등을 겪지만 산적들이 침입하자 농부와 사무라이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그들을 모두 전멸시킨다. 여기서 네 명의 사무라이와 다수의 농민이 희생된다.
노동요를 부르는 백성들을 보면서 간베이는 이렇게 말한다. "또.. 살아남았구나.. 이번도 또, 진 싸움이였구나.. 이긴 것은 저 농부들이다. 우리들이 아니야"
봄이 오자 살아남은 세 명의 사무라이들은 평화롭게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뒤로 하고 그 마을을 떠난다.